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리 왕조 (문단 편집) === 수니파 개종 === 알 무이즈는 겨우 9세의 나이로 지리 왕조를 계승하였고 고모인 움무 말랄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즉위 직후인 1016년 함마드 왕조의 수니파 선포에 영향을 받은 이프리키야 (지리 왕조의 본거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지리 왕조의 겨울 수도[* 1057년까지 본 수도는 카이로완, 여름 수도는 알 마흐디야]였던 알 만수리야의 시아파 2만여명이 학살당하는 소요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그해 함마드 왕조와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2년 후인 1018년에는 함마드 조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1022년 친위 쿠데타를 통해 친정을 시작한 알 무이즈는[* 고모이자 양어머니였던 말랄은 이듬해 병사. 무이즈가 직접 장례 주관.] 스승인 아불 하산 알리의 영향으로 수니파 말리카 법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027년 그는 트리폴타니아에서 파티마 왕조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제나타 베르베르 부족을 도와 트리폴리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지리 왕조와 파티마 조와의 주종 관계는 악화되었다. 1038-40년엔 장남인 압둘라가 내전 중인 시칠리아로 출정하여 일시적이지만 섬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한편 1040년대 들어 이프리키야엔 재해와 가뭄이 닥쳐 기아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통화 가치가 하락하는 등 경제 상황이 안좋았는데 파티마 왕조에게 납부하는 백만 디나르의 연공은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045년, 알 무이즈는 카이로완의 말리키 법학파들과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민중의 여론에 떠밀려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파 대신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에 복종을 표하였다. 150여년 만에 이프리키야가 수니 이슬람으로 복귀한 것이다. 심지어 새로 발행된 동전에는 파티마 칼리파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단자'로 표현되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파티마 조는 쇠퇴해가던 국력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결심하였다. 이에 키레나이카 지방을 어지럽히던 베두인 부족인 바누 힐랄과 바누 술라임이 지리 왕조를 향해 파견되었고 이는 이프리키야에 재앙으로 다가왔다. (1051-52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